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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에 대한 미학적 고찰

[얼굴풍경]

 

얼굴의 옛말이 얼꼴 이다. 그 사람의 혼이 깃든 얼굴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인생을 읽는다. 더욱이 나이 듦과 더불어 우리들의 일상이 하나의

역사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겪는 삶의 질곡(桎梏)이 주름으로 얼굴에 형상화되어 난해한 기호 체계(記號 體系)를 이룬다. 그러므로 얼굴은 갖가지

기표(記標)로 그려진 한 폭의 풍경이기도 하다.

 

머리 앞면의 둥글고 편편한 ‘흰 벽’ 위에다 눈과 코와 입 등의 ‘검은 구멍’들의 다양한 조합으로 ‘안면화’하여 개성 있는 얼굴을 그려 낸다. 그것은

타자를 향하여 갖가지 지표(指標)를 발화하는 Wi-Fi에 비유할 수 있으며,동시에 얼굴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 존재의 증표가 된다.

 

한편 얼굴의 풍경화(化)는 삶의 궤적에 어느 순간적 감정이 교차되면서 빚어내는, 표정이 그려내는 그림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이를 클로즈업해 보면

얼굴은 단지 배경의 한 요소이기를 그치고 그 자체로 독립된 대상이 되며, 얼굴 자체로 감정-이미지를 아우르는 새로운 풍경을 형성하게 된다.

 

이같이 사람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내면의 지도이자 하나의 풍경이 될 수 있다.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오늘의 형편은 어떤지 그리고 내일은

어떨지가 그 사람 얼굴에서 한눈에 짐작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얼굴 풍경이 곧 그의 인생 풍경인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타자의 시선으로 건너편 얼굴에 형상화된 삶의 질곡을 풍경처럼 관람한다.

 

 

[ ‘페르소나’ 그리고 잉여얼굴]

 

우리는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얼굴과 동시에 볼 수는 없다.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실시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즉 얼굴은 단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내가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보여 지는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얼굴이 만들어 진다면 ‘바라봄’과 ‘보여짐’의 상관관계에서 생성되는 ‘시선의 권력’과

‘얼굴의 사회성’ 등은 얼굴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개념이 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사회적 환경이 내게 부여하는 역할과 지표가 얼굴에 새겨진다. 얼굴은 교감의 장으로서 내가 속한 사회적 집단과 나의

주관성이 교차하는 곳이며 사회가 나에게 씌우는 가면이자 내 개성이 담긴, 다시 말해 얼굴은 내가 한 개인이 되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가면은 사회적 생존에 필수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인이역, 삼역도 현실에서 그리 낮 설지 않다. 생존을 위해서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페르소나’가

필요했고,우리는 언제나 타자가 원하는 무엇이 되어야만 했다. 이 같은 가면의 역할은 얼굴에게 부여된 사회적 권력을 행사하여 타자를

조정함으로써 현실에서 자아실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인간 세상은 욕망이 난무하는 가면무도회와 같다.

 

그런데 만약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 버리면?

‘얼굴 그 자체로 잉여 이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카타리의 공저 ‘천의 고원’중의 한 구절이다. 그들 말에 의하면 얼굴 내지

안면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회성이 기표로서 가면처럼 머리에 덧씌워질 때라야만 비로소 인간은 의미 있는 얼굴을 갖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회적 기표가 결여된 얼굴 말하자면 얼굴에서 사회적인 표정을 소거시키면 그것을 ‘잉여얼굴’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성이

얼굴에서 소거되었다는 의미는 곧 사회에서 역할이 사라진 소외된 존재, 뒷방 더부살이들의 얼굴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쉽게 말하면 잉여 인간의 얼굴이 ‘잉여얼굴’ 이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전형적 잉여얼굴들은 종로3가 인근의 종묘공원에 가면 쉽게 만나 볼 수 있다.시간은 남아도는데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해서

멀리 갈수도 없는 어르신들이, 지하철 타면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가까운 도심의 공원에 자연히 찾아들기 마련이고,오래전부터 그렇게 소문이 나면서

하릴없는 노인네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무료한 한나절을 때울 수 있는,어르신들의 사교장으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이분들은 이미 노동의 짐을 벗고 지금은 경제적 면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기에 잉여인간으로 간주 될 수 있으며, 더불어 이제는 더 이상

사회생활에서 접대용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오늘날 우리 시대의 대표적 잉여얼굴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다.

 

 

[잉여얼굴은 야누스인가?]

 

삼라만상은 양면성과 상보성의 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잉여얼굴의 또 다른 야누스적 함의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가?

들뢰즈와 카타리는 이런 의문에 대하여 ‘천의고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얼굴 내지 안면성은 ‘의미화’와 ‘주체화’의 두 지층 사이에 있다는 것이고, 이때 비록 얼굴의 해체에 이르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기표로서 ‘의미화(사회성)’가 제거된 잉여얼굴에는 결과적으로 개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주체화’만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주체화란 무엇인가?

잉여얼굴에서 ‘잉여’를 제거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고 개인의 정체성을 되돌려 받아 각자의 개성을 확보하는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해 이제는

나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고 불필요해진 의미화 내지 사회성을 ‘잉여’로서 오히려 사회에 되돌려 주고, 반대로 그동안 사회로부터 억압 받았던

내 정체성을 돌려받아 오롯이 나만의 개성을 확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잉여가 제거된 잉여얼굴은 사회적인 기대나 요구와는 무관한 전적으로 자신에게 귀속된 표정의 자기 내면의 얼굴이며, 안면성을

개인 차원으로 회수하여 주체성을 확립함으로서 내면의 진실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본다.

 

위에서 종묘공원의 어르신들은 상실과 망각으로 내몰린 오늘의 전형적인 잉여얼굴이 라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을 의미화에서 주체화로

바꾸는 순간 이들은 오히려 거추장스런 사회적 가면을 훌훌 벗어 던진 이 시대의 가장 정직하고 고독한 얼굴로 다가왔으며 세상에 그 어떤 실제

보다도 더 주관적인 오브제가 바로 이들의 ‘민얼굴’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오늘날 성형술 등 얼굴 훼손과 각종 이미지 왜곡이 성행하는 세태에서 이 같은 노년의 꾸밈없는 원형적(原型的) 얼굴은 이 시대의 담론이

담긴 기호(記號)로서 사진가의 특별한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영정사진]

 

영정사진은 사후 타인에게 공개되는 살아생전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기록행위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기릴 사람들을 위한 제례용(祭禮用)이기 때문이다. 영정사진이 수행하는 가장 큰 기능이 바로 애도와 추모이다. 그러므로 영정사진은

죽은 자가 주인공 같지만 실제로 그 역할은 엄밀하게 말해서 남은 자의 몫이다.

 

영정사진은 또한 한 사람의 Memento Mori를 가리키는 지표인 동시에, 그의 일생의 업(業)이 단 한 장의 사진에 집약된, 풀어내야할 도상기호

이기도 하다. 기호로서 사진에 특정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 여는 개인의 기억과 더불어 그 시대의 담론이 개입되어야 한다. 감상자는 자신의 기억에

축적된 사회적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사진의 기표를 재구성 하여 나름대로 기의를 추론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신의 한계 내에서 ‘아는 것’만

보게 된다.

 

기호로서 사진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 하려면 단지 안다는 것 보다는 느끼며 ‘공감’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사진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는

그 기호만의 특별한 해석에 필수적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머리보다 가슴에 강한 감성적 울림을 준다. 여기서 공감은

인간의 내면 풍경을 열수 있는 마지막 열쇠가 된다.

 

끝으로 영정사진은 그 시간적 차원에서 존재와 동시에 부재라는 이중적 함의를 가진다. 그것은 한때 존재를 비추었으나 지금은 부재를 바라보게 한다.

생전의 시간은 아깝게 흐르고 기억은 너무나도 덧없다.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도 세상이 나를 기억해 주기를 정말로 바란다. 그래서 살아생전 기억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진으로 찍어 기록해 둠으로써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시간 속에 각인해 두려고 한다. 영정사진의 생존법이다.

이렇게 개인의 기록이 사회의 기록이 되고 사회의 기록은 곧 역사가 된다.

 

 

[전시를 기흭하며]

 

막상 전시를 하려니 할 일이 넘쳐난다. 전시장소를 비롯해서 ‘작가의 글’ 등 작성, 모니터로 쓸 스크린의 선정, 전시장 조명과 레이아웃 그리고

전시도록과 포스터 등 챙겨야 할 것들이 정말로 많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포인트로 세가지를 꼽아본다.

 

첫째가 전시 방식이다.

전시해야 할 사진이 천장이 넘는 지라 갤러리의 한정된 전시공간을 고려할 때 천개의 인화된 사진액자로 전시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애당초

불가능 하다.(넓은 광장에서 라면 몰라도)

그렇다면 그 비법은?

액자에 사진 대신 ‘영상’을 넣으면 된다. 여러 장의 사진을 한 묶음의 슬라이드로 만들어 십여개의 대형 LCD스크린에서 보여주면 된다.

사진전시=인화된 사진으로 보여주기라는 과거의 통념을 깨는 발상의 전환이 다소 낯설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현대예술의 진로가

탈장르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비추어 영상예술의 일원인 사진예술도 언제까지나 옛 보여주기 방식에 집착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둘째는 탈 유형학적(類型學的) 전시이다.

영정사진은 오로지 개인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기리기 위한 주관적 사진임에 반하여 유형학적 사진은 객관적 내지 가치중립적으로 사회적

타이폴로지(Typology)를 지향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 존립기반이 다르다. 그런데 문제는 전시장에 걸릴 영정사진들이 모두 정면 사진이고

외관상 비슷한 이미지들의 반복 배열로 인하여 형식상으로만 볼 때는 일견 유형학적 중성사진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의

디지털 현상 등 전시물 제작과정에서 독일 유형학파의 ‘아우그스트 쟌더’나 ‘토마스 루프’류의 유형학적 요소는 적극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영화의 아이리스(Iris)기법을 차용하여 얼굴만 남겨두고 주변을 어둡게 비네팅(Vignetting) 처리함으로써 가급적 배경을 단순화 하고 얼굴을

배경에서 분리 독립시켜 안면의 디테일로 시선을 유도한다.(유형학적 사진은 반대로 프레임 안에 의복 장신구등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를 포함시켜

집단의 특성을 부각시킨다)

 

*대형화면을 써서 클로즈업 기법을 활용토록 한다. 60인치 정도의 대형스크린에 얼굴 전면을 클로즈업 시켜 실물보다 더 큰 이미지를 구현함으로써

얼굴의 풍경화(化)를 도모하여, 전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낮선 풍경적 얼굴의 이미지에서 애수, 부재, 무의미, 죽음 등 파토스(Pathos)를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셋째로는 촬영된 사진의 질이 영상의 확대에 제약이 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촬영장소가 종묘공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입구의 한 평 남짓한 개방형 통로여서 비좁은 공간을 비집고 간신히 삼각대와 의자 하나 놓고 촬영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완벽한 암실에서의 조명은 꿈도 못꾸고 생콩크리트 벽면을 배경으로 광원 이라고는 유일하게 높은 천정 꼭대기에 매달린 형광등 하나뿐이었다.

카메라 스트로보는 배경의 그림자를 지우는 측면 바운스용 보조 광원 일뿐 길거리 스튜디오의 조명상태는 총체적으로 극히 열악하였다.

그 결과 복도를 통한 약한 잡광과 형광등의 날카로운 빛이 섞인 조명조건으로 인하여 사진의 계조가 깨지고 톤이 일정치 않은 사례가 많았다.

 

어느 면에서는 오히려 거친 톤의 이미지가 험한 세파를 헤쳐 온 노인들 표정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 영상을 어느

정도 이상 크게 확대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이 같은 거친 사진의 질이 화면의 크기를 제약하는 실제적 요인으로 작용 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된다. 여건이 되는대로

조만간 실제 화면에서 이점을 테스트해 보려고 한다.

 

​ 글:김광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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